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낸시'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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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낸시'

멋지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악랄하고, 우스꽝스러운 가지각색 캐릭터를 섭렵해온 63세의 배우 엠마 톰슨이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 거울 앞에 섰다.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낸시’로 분한 그가 말하는 변화, 그리고 나 자신.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2.09.03
 
잠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당신은 전 세계에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60대 배우다. 탄탄한 연기력과 지적인 매력으로 오래도록 사랑받아왔고, 필모그래피에는 몇 개 읊기만 해도 자랑스러울 작품이 가득하다. 그런 당신은 이제, 말 그대로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낼 참이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거울 앞에 서야 한다. 메이크업은 고사하고 보정을 비롯한 기술적 도움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육체로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장년 여성을 연기하는 일. 이건 끔찍한 공포일까, 아니면 세상에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일까? 우리에겐 상상이지만 엠마 톰슨에게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를 찍으면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껴보지 못한 60대 여성 ‘낸시’를 연기한다. 사별한 남편과의 섹스는 일종의 의무 방어전 같은 것이었으며, 학교에서 종교와 윤리를 가르쳐왔던 그는 육체적 쾌락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그랬던 ‘낸시’가 인생에서 처음 비범한 선택을 내린다. 세련된 매너를 갖춘 매력적인 젊은 남성 ‘리오 그랜드’(다릴 맥코맥)에게 ‘퍼스널 서비스’를 받기로 결정한 것. 타인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던 ‘낸시’는 ‘리오’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즐겁게 파악해간다. 대화가 교감의 일부이며, 서로를 존중하는 안전하고 긍정적인 섹스의 과정을 경험한 그는 급기야 이렇게 외친다. “이건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여야 해!”
 

있는 그대로의 몸과 쾌락을 긍정하기

60대 여성의 인생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간의 시간을 통해 내면은 더 풍성해졌을 테지만, ‘낸시’처럼 난생처음 겪는 것들 역시 여전히 무궁무진할 테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미디어의 태도는 어떤가? 나이 든 여성은 어느 순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결혼과 육아에 온 인생을 바치고 허무만 남은 무성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혹시 일정 나이가 되면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욕망이 사라지는 버튼이라도 눌리기에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그럴 리 없다. 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대화의 양상 안에서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일깨운다. 당신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성적 욕망을 말하면 ‘헤프다’는 취급을 받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의 몸을 혐오하도록 조장하는 사회적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긍정해도 된다고. 쾌락은 즐거운 것이고, 그걸 추구하는 우리 모두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영화를 통해 엠마 톰슨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낸시’는 늘 옳은 결정만 내리는 사람은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성실하게 꾸려왔지만 고정관념과 뿌리 깊은 편견도 가진, 말하자면 인간적 결함이 있는 인물이다. 동시에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어젖힐 줄 알며 과오를 바로잡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여성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오르가슴의 쾌락을 느끼는 것 또한 ‘리오’의 ‘제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물론 베테랑 배우인 엠마 톰슨에게도 ‘낸시’를 연기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령 완전한 누드로 거울 앞에 서는 장면 같은 것. 다만 그는 이번 작업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고 말한다. “미디어 산업 안에서 나는 충분히 예쁘지 않고, 이상적인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끊임없는 비판을 들어왔다. 하지만 ‘낸시’를 연기하면서 내가 나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우리는 여성의 몸에 쏟아지는 사회적 기대에 기반해 더 나아 보이도록 가공된 몸을 보는 게 익숙하다. 이제는 미디어에서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난 내 허벅지가 싫다’라고 말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영화이길 바란다.”
 
 

뛰어나고, 못됐고, 좀 돌면 어때?

엠마 톰슨은 여성의 다양한 삶을 연기해왔다. 60대에 접어든 최근 몇 년 사이 행보가 훨씬 거침없어졌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디즈니 역사상 가장 짜릿한 악녀 탄생기를 그린 〈크루엘라〉(2021)가 가까운 예다. 타이틀 롤인 ‘크루엘라’(엠마 스톤)의 “날 때부터 뛰어났고, 원래 못됐고, 좀 돈” 인간이라는 자기소개는 엠마 톰슨이 연기한 남작 부인 ‘바로네스’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다. 온몸에 휘감은 오트 쿠튀르,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는 잘근잘근 밟아버리는 거만함으로 디자이너 커리어를 꼿꼿하게 유지해온 여자. 천국에 갈 착한 여자로 사는 대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꺼이 지옥을 택한 그는 명분 있는 악녀다. BBC One 드라마 〈이어즈&이어즈〉(2019)의 정치인 ‘비비언 룩’은 어떤가? 그는 체면을 중시한 사람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선동가다. “아이큐 70 이하 시민은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은 평범한 수준. 영국판 트럼프처럼 보이는 사악한 포퓰리스트는 우리가 정치에서 눈을 돌리고 비판을 멈추는 순간 맞이할지도 모르게 될 미래를 보여준다. 디스토피아의 경고를 위해 엠마 톰슨은 비호감으로 무장한 캐릭터의 옷을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캐릭터를 경유해 던지는 주제는 늘 시의적절한데, 이는 작가적 역량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카 연기상과 각본상 트로피를 동시에 거머쥔 흔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하워즈 엔드〉(1992), 직접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각색하고 주연을 겸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는 과거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자아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을 그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파격적인 분장을 감행한 마법사 유모의 이야기 〈내니 맥피〉(2006, 2010) 시리즈에도 엠마 톰슨은 주연배우이자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쯤 되면 〈세이빙 MR. 뱅크스〉(2013)에서 〈메리 포핀스〉의 원작 작가 P.L. 트래버스 역할이 그에게 돌아간 것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글쓰기에서는 연기와 같은 종류의 창의적 만족을 얻곤 한다. 내게 진정 격려가 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엠마 톰슨의 말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목소리

초기에 그는 시대극의 기품 있는 얼굴이었으나 판타지 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엠마 톰슨의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그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도 작가주의 감독들의 작품만 고집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부터 모습을 드러낸 ‘시빌 트릴로니 교수’, 〈내니 맥피〉 시리즈의 괴팍한 유모 ‘내니 맥피’, 〈맨 인 블랙〉(2012, 2019) 시리즈의 베테랑 국장 ‘에이전트 O’, 〈미녀와 야수〉 실사판(2017)의 ‘미세스 팟’까지 드라마와 블록버스터를 오가며 대중과의 접점을 늘렸다. 그가 〈내니 맥피〉 시리즈의 각본과 주연을 맡은 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엠마 톰슨의 행보는 카메라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포착된다. 그는 여성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과 그릇된 통념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미의 기준을 제시하는 성형수술을 반대하고, 시상식에서는 여성에게 하이힐 착용을 강요하는 문화를 지적하며 하이힐을 벗어 무대 뒤로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성추행 파문으로 픽사 스튜디오에서 사퇴했던 존 래시터가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 파트 수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에 반발하는 공개 서신을 쓰며 작품에서 하차를 선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삶으로써, 이야기로써 증명해나가는 존재들은 귀하다. 매일같이 불확실성에 휘청이는 우리에게는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니까. 다행히 우리에겐 엠마 톰슨이 있다. 그는 확실하게 멋진 미래의 증거다.
 
 

또 하나의 역할, 사회운동가

2018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수여하는 데임 작위를 받은 엠마 톰슨. 그는 자신의 명망을 환경과 여성, 빈곤과 난민 문제에 앞장서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필요하다면 글을 써서 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빈곤 퇴치를 위한 국제기구 액션에이드의 활동가로서는 아프리카 대륙이 처한 자원 부족 문제와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유럽의 난민 지원 비영리 기구인 레퓨지 카운슬을 통해서는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은 난민을 범죄화하는 영국 정부의 법안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다행히 현실 세계의 엠마 톰슨은 〈이어즈&이어즈〉의 폭주 기관차 ‘비비언 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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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editor 이예지
    photo by 영화 스틸 컷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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