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트와이스 선생님들의 노래처럼 사랑이 뭔지 말하는 건 정말 어려워서 청탁을 받고 한동안 골머리를 썩였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 상태라면 사랑에 대해 방언처럼 쏟아낼지 모르지만, 현재 나는 드물게도 사랑의 무직자 상태다. 세상이 빛나는 일도, 누군가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일도 없으며 모든 것이 상당히 짜증 날 정도로 명료하게 보여 이성적인 말밖에 나오지 않는 거다. 그래도 무언가는 써야 하니, 참고가 될까 싶어 지난 일기장을 들춰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나, 진짜로 사랑했구나…. 열병을 앓는 동안 나는 오지 않을 메시지를 기다리며 허공에 러브레터를 띄우고 있었고(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사랑이 끝나갈 무렵엔 찬 사람은 없는데 차인 사람만 있는 기괴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그걸로 됐어. 나를 완전히 태울 수 있었던 축복을 내게 줬으니…). 그 외 차마 구질구질해 적지 못하는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의 향연을 보다가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나는, 임창정이었던 것이 아닐까?(여기서 임창정이란 TJ 노래방 차트 30위 안에 꾸준히 랭크되는, 특정 발라드 장르에 나타나는 사념을 포함한다). 생각해보면 임창정 발라드의 화자와 나 사이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이 많다. 우린 둘 다 돈이 없고, 구질구질하며, 연인과 사랑을 이루지도 못한 데다 사랑을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설거지하는 덴 어려움을 겪는다. 임창정을 월등히 닮아 있는 내 삶을 비롯해 임창정이 2040 남성에게 미친 정신적 영향력과 태진 및 금영 노래방에 벌어준 수익, 그리고 나의 소설 〈환상통〉이 (가슴 아프게도 판매량과는 무관하게) SNS에 인용됐던 횟수를 고려한 결과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식을 도출할 수 있었다. ‘나=임창정=사랑의 천재’.
「 소년 소녀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 우리의 허기를 채우는가
」 그러므로 사랑의 천재인 내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믿음하에 아이돌과 사랑에 빠지는 흐름을 적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SNS를 하다가 누군가가 호들갑 떨며 포스팅한 한 남자애를 알게 된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하며 시큰둥하게 본다(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신경이 쓰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날은 무난히 넘어간다). 며칠이 지나고 알고리즘의 영향 때문인지 다시 그 애의 영상이 뜬다. 뮤직비디오 정도는 한 번 볼까 싶어 보지만 별다른 인상은 남지 않는다(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최애는 대부분 파트가 적다). 그리고 다음 날, 유튜브를 보며 실내 자전거를 타는데 이번엔 무대 영상이 나온다. 다른 영상으로 바꾸기 귀찮으니까 본다. 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정은 지났고, 영상 재생을 반복하며 자전거를 4시간째 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 나를 흠뻑 적시고 있는 것이 그 앤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순간 깨닫는다. “아, ○됐다!” 그러니까 사랑은 이런 판단 불능의 상황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 그가 나보다 돈도 많고, 사회적으로 명성도 있고, 사랑도 많이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애처로워 보이는 것. 이미 다 가진 듯한데도 뭘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것 말이다. 이유리의 소설 〈둥둥〉의 주인공인 ‘은탁’은 자신의 최애 ‘형규’를 너무 사랑해 모든 걸 다 해준다. 연상의 팬들이 흔히 재력 과시를 위해 곧잘 하는 “카고바지 입고 다녀라, 주머니에 돈 꽂아주게…”라는 농담을 은탁은 정말 실현한다. 그는 부잣집 딸이고 집과 차를 팔아 길거리에서 춤추던 형규를 적극적으로 서포트해 유명 아이돌의 반열에 올린다.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을 동시에 창조하는 것. 멀리는 그리스신화의 〈피그말리온〉에서 가깝게는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여인〉까지 이어지는 변신 로맨스물의 성별 반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가진 건 사랑하는 마음과 돈뿐인 이 조선의 메디치는 형규에 대한 마음을 아름다운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것에 비유하며 “신선한 먹이를 먹이며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는 것이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이듯 나는 형규에게 안전하고 보장된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고 그것으로 족했다”고 말한다(내가 은탁이었다면 공연 예술의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고 말했을 텐데 아마 형규가 그 정도로 춤을 잘 추진 못했나 보다). 이런 순수함, 그러니까 대가 없이 그저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라는 ‘토이적’ 인간 은탁에게 외계인도 감동한다. 게다가 ‘좋은 사람’인 ‘오빠’가 자판기 커피 속에 마음을 담아 건네는 동안 은탁은 루이 비통과 혼다 바이크와 슈프림과 리모와의 컬래버 캐리어를 사준다(한화로 190만원에 출시돼 16초 만에 품절됐다고 한다). 만약 토이의 노랫말 속 그녀가 LOVE에서 O, E를 뺀 L과 V를 갖고 싶다고 했다면 오빠는 뭐라고 했을까? 좋은 사람답게 “너 지금 된장녀 같다…” 하고 따스한 충고를 남기며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야생동물이라는 비유가 꽤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젊고 아름다운 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어린 짐승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는 것과 같은 원초적인 기쁨을 준다(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동갑인 우리 할머니의 최애 프로그램이 〈동물의 왕국〉과 〈SBS 인기가요〉다). 고결하고 사랑스럽고 때때로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어린 짐승의 움직임. 거기엔 과장이 없고 의도가 없다. 혹 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다. 아름답다.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다. 야생동물의 2가지 특징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우리의 눈을 수전노같이 반짝이게 한다. 대부분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지만, 문제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교감 불능의 벽을 넘어 그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발생한다. 〈시튼 동물기〉에서 자신의 짝을 떠나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은 ‘늑대왕 로보’의 경우는 어떤가? 자기 고양이가 생전에 헬리콥터가 되고 싶어 했다며 사체와 모형 헬리콥터를 함께 박제한 괴짜 노인의 경우는? 그는 정말 자기 고양이의 뜻을 이해한 걸까?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그리즐리 맨〉에는 회색 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국립공원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티모시 트레드웰이라는 남자가 나온다. 트레드웰은 금방이라도 그를 찢어 죽일 수 있는 곰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우리는 친구라고 하다가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카메라를 보며 눈물짓는다. “나는 그들을 정말 사랑하는데 그들은 쌀쌀맞아요.” 트레드웰은 야생에서 보낸 열세 번째 여름, 곰에게 잡아먹혀 죽는다. 내 소설 〈성소년〉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 빛나는 별을 손에 쥐고 싶어 했던 4명의 여자가 나온다. 그들은 각자의 아이돌 ‘요셉’을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 사람의 눈에 비치는 요셉은 구질구질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줄 왕자님이자, 지난날에 사랑했던 어린 소년이자, 아들이자, 또 운명의 연인으로 각각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기 답을 내릴 수 있는 소년은 침묵한다. 그는 시체, 혹은 박제된 성인과 같은 상태로 그저 존재할 뿐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무도 아닌 소년. 어쩌면 우리는 야생동물에게 그러듯 소년 소녀들에게서도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 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걸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착각과 오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애초에 무엇이 착각이고, 또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있는 걸까?
픽사의 장편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주인공 ‘메이’는 슈퍼 아이돌 ‘4★town’을 사랑하는 열렬한 포타우니다. 사춘기를 맞은 이 소녀가 여자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등장하는 것이 친구들과 함께 4★town의 콘서트에 가는 일이다. 절반쯤은 관념이나 매개체인 ‘오빠’라는 기호를 두고 그 안에서 여자 친구들끼리 거울반사해가면서 사랑도 하고 우정도 나누는 것. 사실 평범한 팬심이라는 건 딱 이 정도인지 모른다. ‘성공한 덕후’가 아닌, ‘성장하는 덕후’라는 의미의 성덕. 소녀들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들끓는 마음을 오빠들에게 던지고, 정화돼 그 세계에서 졸업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복잡한 사랑의 미로를 통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넥스트 레벨’인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는, 미로의 바깥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 독특한 이정표에 마음이 가곤 한다. 요컨대 동방신기 해체 이후 유노윤호와 영웅재중이 처음 공식 대면한 국방부 행사에 참석해 윤재 커플(윤호·재중) 플래카드를 흔든 외국인 팬. 아직도 젝키 6인 지지를 선언하는 팬의 어카운트에 올라오는 준엄한 꾸짖음이나 몇 해 전 일본 오사카의 한 콘서트홀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인 팬이 “(그렇지만) 유천이 온다면 한 번은 가야지…”라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던 것. 영화 〈성덕〉의 오세연 감독이 차마 넣지 못했다고 한, “정준영이 죗값을 치르고 나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라고 한 팬의 고백 같은 것 앞에서 나는 오래 얼쩡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사랑이 뭔지 아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신의 입장에서 미로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고 그 속에서 헤매는 인간들이기에 그런지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게임의 참가자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에 대응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쩌면 하나뿐인지 모른다. 기꺼이 그 헤맴을 즐기는 것. 미로의 신비를 즐기는 것. 사랑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처음인 듯 찾아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