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시대
」넷플릭스의 중드 〈겨우, 서른〉엔 이혼 후 서로를 더 잘 보게 된 30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둘은 신혼 내내 크고 작은 갈등을 빚다가 유산이라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혼에 합의하지만,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계약 동거를 한다. 부부가 아닌 상태에서 다시 시작된 새로운 관계는 부부였던 시절보다 서로를 더 ‘잘 들여다보는’ 사이로 나아간다. 이혼이 (뜻밖에도) 결합의 돌파구가 됐다는 얘기다. 통계청이 2020년도에 발표한 인구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 건수는 약 11만1천여 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 관련 프로그램은 치솟는 숫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혼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과 색안경 낀 시선에 화두를 던진다. 이혼이라는 결단이 물론 결코 쉬운 일도, 가벼운 일도 아니지만 과거처럼 주홍색 낙인까진 아니지 않을까? 결혼에 대한 사회적 통념 대신 자신의 주관을 따르는 2030들은 ‘이혼’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당신은 이혼이 새로운 사랑과 관계, 삶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나? 여기 이혼을 겪은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있다.

이혼으로 알게 된 것들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1년 반 동안 뜨거운 연애를 하고 28세가 되던 해에 결혼, 이듬해 반년간의 별거를 거쳐 이혼한 회사원 P(33세)는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편과 사이가 정말 안 좋았지만 꽤 오랫동안 이혼을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는지. 그때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 얼마나 불행하게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어요. 다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할 거예요. 온전히, 나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거든요.”
이혼 3년 차 마케터 K(37세)의 입에서도 ‘나다움을 되찾는 삶’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언제 이혼하길 잘했다고 느끼냐’는 질문을 종종 해요. 그때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매 순간!’이라고 답하죠. 6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뭔가를 결정할 때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항상 남편, 아이가 우선순위이자 기준이었으니까. 운동을 하고 싶어도, 뭔가를 배우고 싶어도 남편과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에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거든요. 나를 위해 내린 결정으로 하루를 채우고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
달라진 ‘사랑’
」실패한 내 결혼 생활을 통해 알게 된 건, 두 사람의 관계, 유대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건 설렘이나 긴장, 성적인 끌림 같은 화학작용이 아니라 네 편에 서 있다고 표현하는 것, 보듬어주는 것, 배려하는 것, 묵묵히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에요.
‘좋다’, ‘보고 싶다’ 같은 감정은 서막을 열어줄 뿐이죠. 부부라는 관계를 계속 작동하게 하는 것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예요. ‘난 아직도 널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라는 감정보단 육아, 집안일 등의 행위를 책임감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죠.” 작가 S(36세)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두 사람의 사랑을 묶어주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혼을 통해 더 나아가는 관계를 맺고 잘 사는 사람도 많지만, 제 경우엔 결혼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를 유지하는 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지금 만나는 연인과 결혼식도, 혼인신고 같은 것도 하지 않고 함께 사는데 지금 그와 나누고 있는 감정과 관계가 예전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부부’ 같아요.” S는 서로의 일과 삶을 지지하는, 함께 있는 시간엔 상대에게 더없이 충실하지만 ‘따로’의 시간 역시 존중하는, 자기다움을 잊거나 잃을 필요가 없는 관계가 이혼 후 깨닫게 된 사랑의 의미라고 전했다.
나아가는 사람들
」남편의 지속적인 외도와 불륜이 발각된 후에 오히려 이혼을 ‘통보’당한 전업주부 J(32세)는 남자에겐 면죄부를, 여성에겐 책임과 수습을 전가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갈라서기가 망설여진다고 토로했다. 킨제이 연구소의 헬런 피셔 박사는 그 원인을 ‘여성이 남녀 관계에서 관리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 경우에도 이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구로연세봄정신의학과의원의 박종석 원장은 ‘노블티 시킹’, 즉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보상하기 위해 새로운 자극이나 쾌락(외도, 도박 등)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자기애적 인격 성향을 지닌 남성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임상심리 상담사 김정은 박사는 배우자의 외도가 밝혀진 후 어색함,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억지로 ‘화해’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반복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힘든 시간인 건 알지만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잘 견디고 넘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삶에서 잘 알지 못하는 삶으로 넘어가야 할 때 긴장과 불안감 같은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하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이런 시기를 ‘과도기’로 명명한다. “과도기는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시기다. 과도기에는 종종 평소에 알지 못했던 생명력이 발휘되고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과도기에는 삶이 그동안 몰랐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이런 잠재력이 뒤이어 오는 안정기에 계발되고 다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형태의 과도기는 그런 시기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우리가 그 시기를 다른 태도(긍정적이며 기대하는 태도)로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한다. 이혼에 대한 긴 고민 끝에 결혼 후 서로에 대한 의무에서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한 마케터 H(37세)는 ‘휴혼기’를 통해 자신을 되찾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겐 우리가 ‘이혼 진행 중’인 부부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아니에요. 나 자신을 되찾고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나를 사랑해서 이 과정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