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의 페미니즘 평행이론?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Society

남조선의 페미니즘 평행이론?

당신이 상상하는 100년 전 한국은 혹시 일부다처제 시대? 생각보다 조선 시대에 여성 인권 운동은 활발했고, 또 생각만큼 지금 여성 인권이 훨씬 더 나아지지도 않았으며, 뿌리 깊은 여성 혐오는 겉모습만 바뀐 채로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5개의 키워드로 되짚어본, 남조선의 페미니즘 평행이론.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1.03.11
 

신여성과 ‘된장녀’ 사이 

 1923년 9월 창간된 잡지 〈신여성〉은 여성을 위한 시사 교양 및 대중 잡지였다.

1923년 9월 창간된 잡지 〈신여성〉은 여성을 위한 시사 교양 및 대중 잡지였다.

PAST 1927년 1월, 〈동아일보〉에 〈나의 혼인관〉이 연재되다 
‘신여성’은 1920년대 초반에는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혐오의 대상이 됐다. 1927년 〈동아일보〉에 9회까지 연재된 〈나의 혼인관〉은 “현대 여성들은 신사조를 맛보면서도 금전의 노예성은 갈수록 풍부하다”라며 신여성을 비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의 ‘신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의 입장은 달랐다. 민족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유영준은 2주 뒤 ‘〈나의 혼인관〉을 읽고’를 투고해 정면 반박에 나섰다. “그러한 속단을 하는 것은 신여성을 모욕했다는 것보다도 여성 문제를 경홀히 취급”한 것이라 지적하며 ‘허영녀’로 낙인찍기에 앞서 조선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라고 일갈했다. “현 사회제도는, 특히 현재 조선의 형편으로는 여자가 날고뛴다 해도 경제적으로 남자와 경쟁을 하기는 고사하고 호구지책을 하기도 어려울 만큼 되어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오히려 ‘먹을 것이 있는’, 즉 경제력이 좋은 남자를 택한 여성들의 행위를 현실을 똑바로 관찰한 여성이라고 치켜세웠다. 나아가 유영준은 남녀평등은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관념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PRESENT 2005년, 디시인사이드에서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하다 
2000년대, 여성 혐오는 ‘00녀’라는 이름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은 IMF를 겪고 난 뒤 박탈감이 심했던 한국 사회에서 별다방 커피를 즐겨 마시고 나를 위해 명품 백 사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성들을 ‘된장녀’, 김치녀’라 부르기 시작한 것.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 소비를 마다하지 않는 ‘신여성’의 출현에 아직도 뭇 남성들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싱글 여성의 소비력을 비난하던 사람들은 경제력을 갖춘 남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생존 욕망을 ‘취집’이라는 말로 비하하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36%에 달해 OECD 국가에서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여성 경력 단절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착한 여자냐, 나쁜 여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중 잡지 〈삼천리〉.

대중 잡지 〈삼천리〉.

PAST 1934년, 〈삼천리〉에 ‘여성은 천사인가, 악마인가’를 주제로 논평이 실리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을 두고 논평하는 일 자체가 버젓이 잡지 형태로 출간된 적이 있다. 당대 화제를 다룬 대중 잡지 〈삼천리〉는 폭넓은 필진이 참여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중 1934년 5월 1일 자로 실린 제6권 5호에는 ‘당신 눈에는 여성이 천사로 보입니까? 악마로 보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다섯 남성의 글이 실렸다. 어떤 사람은 “여성은 악마다. 정말 악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떠한 굳센 남자라도 유혹할 만한 무기를 갖고 있으니까?”라며 원색적 혐오를 드러낸 한편, “여성 전체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천사로 보이는 이”의 “주부 타입”과 “악마같이 보이는 이”의 “창기 타입”으로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설명한 사람도 있었다. ‘바다와 나비’로 알려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기림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맨 처음에는 천사로 보였고 다음에는 악마로 보이더니 지금은 그저 인간으로 보입니다. 왜 그러냐고? 맨 처음에 나는 그를 숭배했고, 다음에는 그를 미워했고, 그다음에는 그의 미도 추도 모두 그가 인간인 데서 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것이 모두 사랑스러웠소.”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건 여성은 평가받는 대상, 남성은 평가하는 주체라는 사실이다.
 
PRESENT 2010년 7월, 걸 그룹 미쓰에이가 데뷔곡으로 ‘Bad Girl Good Girl’을 발표하다 
〈미스트롯〉 초등부 참가자를 인터뷰하면서 서두에 ‘뽀얀 피부’와 ‘미모’를 자세히 묘사한다거나, 미성년자 여성 아이돌의 사진을 올리며 몸매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거나. 21세기에 여성 아동이나 청소년은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적 욕망은 없기를 요구받는다. N번방의 피해자들 중 트위터에서 몸 사진을 올리는 ‘일탈계’를 운영했던 여성 청소년들은 ‘그래도 싸다’라는 식의 취급을 받는다. 여전히 성범죄 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꽃뱀’ 아니냐는 의심을 사지만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여성들을 불법 촬영한 공무원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를 풍자하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걸 그룹 미쓰에이가 ‘Bad Girl Good Girl’에서 “춤추는 내 모습을 볼 때는/넋을 놓고 보고서는/끝나니 손가락질하는/그 위선이 난 너무나 웃겨”라고 노래한 것도 벌써 11년 전 일이다.
 
 

단발과 노브라의 공통점 

PAST 1925년 8월, 조선의 세 페미니스트가 단발하다 
1920년대 경성에서는 여성의 단발이 장안의 화두였다. 당대의 여성운동가 허정숙은 동지 2명인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8월 21일 오후 6시경 길게 기르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당시 그들의 단발은 신문 기사와 논평으로 소개될 만큼 화제였다. 허정숙이 이 일화를 〈신여성〉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그는 자신의 단발에 대해 명백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물과 풍속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 이제까지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여성의 순수한 미의 가치가 아닌 희롱물로서의 미이자 여성 자신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이었으며, 도리어 여성을 더 굳게 구속하는 수단이 됐다는 것. 단발한 후 겪은 주변 반응에 대해 허정숙은 “별별 요절할 만한 말들이 있었지만은”이라고 하면서도 “조금 지식인 계급에 있는 분들”의 경우 “대단히 좋아 보입니다. 시원하지요”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적었다. 또한 주세죽은 1925년 8월 〈신여성〉에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라는 내용으로 기고했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여간 지금 조선에 있어서는 단발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난이 많습니다. 단발은 호기심에서 나온 일종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고 혹은 몰각한 부르주아적 남녀평등론자의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발이 그러한 모든 비난을 들을 만큼 중대하게 취급되는 것을 우습게 압니다.”
 
PRESENT 2019년 7월, 화사가 노브라 공항 패션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다 
21세기 한국의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고 설리의 경우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찍은 자연스러운 셀카를 SNS에 자주 올렸으며, 화사 역시 공항 패션에서 노브라 패션으로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던 악플들. “안 궁금하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예의상 가려야 한다” 등 타인의 몸에 대해 ‘고나리질’하려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같은 유두를 가진 남자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속옷임에도, 여자가 입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유독 비난했다. 하지만 고 설리의 말대로, 브래지어는 이제 여성들에게 ‘액세서리’, 즉 필요하거나 입고 싶을 때 입고 그렇지 않을 때 입지 않는 속옷이 됐다.  
 
 

 사회의 사각지대, 여성 빈곤

1929년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가 발행한 여성 잡지 〈근우〉는 창간호 발행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종간되었다.

1929년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가 발행한 여성 잡지 〈근우〉는 창간호 발행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종간되었다.

PAST 1935년, 허균이 노동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다
8·15광복 이후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적 사각지대에 놓였다. 1945년경 파업이 주로 일어난 곳은 방직 공장, 주도 세력은 여성이었다. 조선 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부인부장이었던 허균은 “우리 부인 노동자에게 해방의 혜택이 무엇인가? (중략) 조선의 유아 사망률이 세계적으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명예스럽지 못한 사실은 조선 부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근로 부인의 산전산후의 무리한 노동에서 오는 것으로 이는 오늘에 발견된 일이 아니다”라며 여성 노동의 현실을 고발했다. 1933년 9월에는 신설리 종연방직과 경성제사공장에서 500여 명이 임금 인상과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했고, 여기에 가담했던 허균은 파업 조종자로 지목됐으며, 1934년에는 경성 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검거돼 1935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조선의 완전 독립이라고 할까요. (중략) 소수 자본가들의 해방은 우리들의 죽음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몸으로서 지나간 그날과 같이 꿋꿋이 우리 무산자를 위하여 또 무산자가 한 사람 한 사람 뭉치도록 힘쓰기를 결심하며 새로운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가 1946년 〈여성공론〉 창간호에 쓴 글 ‘나의 지나온 생활’ 중 일부다. 

 
PRESENT 2020년 11월, 36년째 이어지는 김진숙 복직 투쟁을 위해 동료들의 단식이 시작되다 
1986년 한진중공업에서 노동운동으로 고문에 가까운 조사를 받고 해고당한 뒤 35년이 지나도록 복직하지 못하는 김진숙은 한국 여성 노동계의 상징 같은 존재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김진숙이 만약 남성이었다면, ‘가장’이었다면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까? IMF 외환위기 때 경제적 자립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건 입사 과정에서 부당 대우받고, 회사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정리 해고당한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LG트윈타워에서 일방적 해고 통보로 실직 위기에 처해 투쟁하고 있는 청소 노동자들도 대부분 여성이다. 2020년 코로나 블루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대는 20대 여성이다. 2020년 1월부터 8월까지 자살을 시도하는 20대 여성은 전체 자살 시도자의 32.1%로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주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기 때문에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노동자층이 젊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3월에 20대 여성 중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성교육은 불온한가

PAST 1927년 1월, 〈중외일보〉에 정종명이 성교육 필요성을 역설하다  
‘실질적인’ 성교육에 관한 고민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고등여학교 시절에 성교육을 가르치는 것은 시기상조며, 성교육이 오히려 풍기 문란으로 이어진다며 반대했지만, 간호사 겸 산파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정종명은 성교육은 “가정과 학교에서 같이 힘써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1929년 월간 여성 잡지 〈여성지우〉에서 개최한 성교 문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성교육 대상을 여성에게 한정지으려 하자 ‘남녀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좀 더 대담하게 남성에게도 성교육을 해라 하고 나아가는 것이 대단히 좋을 줄 압니다. (중략) 우선 남녀 학생으로 보더라도 남학생의 무책임으로 해서 여학생계를 탁란시키는 것만 보아도 알 것 아니에요”라며, 정종명은 성교육의 부재로 인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PRESENT 2020년 7월, 한 고등학교에서 학부모 반발로 피임 교육이 취소되다 
작년 여름 전남 담양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콘돔 사용법 교육을 위해 학생들에게 바나나를 지참해오라고 했다가 학부모들의 심한 반발로 피임 교육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성교육을 시켰다가 성적 호기심을 부추겨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이 반발 사유였고, 이는 ‘학교에 성교육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여전히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성 지식을 습득하는 경우는 절반도 안 된다. 바른생각이 발표한 2018 섹스 서베이에 따르면 청소년기에 첫 섹스를 경험하는 사람은 18%가 넘는 한편, 과거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이 지금의 성 생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44%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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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예린
    art desginer 김지은
    photo by Getty Images(스타벅스/줄자/브래지어)
    /고려대학교 도서관(잡지)/국립중앙박물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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