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삽니다
」
(조한진희)재킷 79만8천원 캘빈클라인. 니트 톱 4만5천원 히든 포레스트 마켓. 팬츠 60만원대 레호. 귀고리 3만5천원 앵브록스. 반지 32만9천원 포트레이트 리포트.(굴러라 구르님)블라우스 21만9천원 분더캄머. 드레스 15만원 코스. 이어 커프, 반지 모두 가격미정 헤이. 팔찌 1만원대 H&M.
사회단체 활동가, 전 다큐멘터리 감독
여성 인권과 장애 인권 운동 등에서 활동한다. 10년 넘게 암으로 투병과 완치를 오가는 중이며, 그 경험을 엮어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② 굴러라 구르님(20세)
본명 김지우, 인기 유튜버, 뇌성마비 장애인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강의를 듣는 올해 새내기 대학생. 영상 만들기를 사랑하며, 패션과 뷰티에 관심이 많고 여행과 군것질을 좋아한다.
COSMO 촬영 이틀 전 스튜디오 현장에 와보고 엘리베이터 찾기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 구르님에게 입구 영상을 찍어 보냈어요. 그러고 나서 ‘너무 과도한 호의였나?’, ‘혹시 불쾌하진 않았을까?’ 걱정되더라고요.
굴러라 구르님(이하 ‘구르님’) 아뇨, 저는 고마웠어요. 제가 둔감한 건지 모르겠는데,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때는 실수할까 봐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조한진희(이하 ‘조한’) 그렇게 물어보는 게 좋은 태도 같아요. 한번은 제가 암 환자에게 “극복할 수 있어”처럼 용기를 주는 말을 하는 것도 실례라는 식의 글을 썼는데, 그 뒤로 사람들이 저를 만나도 안부를 묻지 않는 거예요. 하하. 실수할까 봐 아예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 거죠. 그러면 관계가 맺어지지 않잖아요.
COSMO 일전에 김원영 변호사님이 어떤 유형의 장애인지 묻기보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라 했죠. 두 분에겐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요?
구르님 만날 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장소, 그리고 걸을 때 약간의 부축 정도예요.
조한 내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저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 아팠던 뒤로 몸 상태가 예측 불가예요. 김원영 변호사님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체력으로만 보면 저는 김원영 변호사님의 절반밖에 안 될 거예요. 2시간만 집중해 일하려 해도 현기증이 나서 녹초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저 때문에 분위기를 망칠까 괜히 미안해져요. 그렇게 자기 검열하는 저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죠. 하하.
COSMO 구르님은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한창 체력이 좋을 나이고, 조한진희님은 겉으로 볼 땐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노화와 질병을 겪죠.
조한 30대 중반부터 아파서 그런지, 제게는 질병과 노화의 구분이 없어요. 그저 조금 젊은 노년을 산다고 생각하죠.
구르님 저 역시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노년의 몸에 공감하지 않나 싶어요. 고등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운동 치료를 자주 건너뛰었더니 몸이 확 굳는 걸 보고 무섭기도 했어요. 시간이 더 지나면 과연 내 몸이 어떨지에 대한 불안함이 있죠.
COSMO 몸을 ‘긍정’하기보다 ‘수긍’하는 게 중요하단 생각도 들어요.
구르님 어렸을 땐 제 몸을 객관화해서 보는 게 싫었어요. 제 머릿속의 저와는 다르게 너무 부자연스러우면 보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계속 찍고 편집하면서 ‘저게 김지우구나’ 하고 직시하게 됐죠. 노력해서 내 몸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내 몸과 마주하면서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COSMO 조한진희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건강 산업이나 아프지 않은 몸이 아니라 아픈 몸에 대한 상상력이다”라고 쓰신 적 있어요. 두 분은 그 상상력을 확장하기 위한 콘텐츠를 만들죠.
조한 인간의 몸에서 질병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해요. 질병이라는 자체가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찾아오는 거죠. 줄타기할 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는 것과 비슷한 이치예요.
구르님 유튜브를 시작한 게 장애를 알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자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저 초등학생 때부터 영상 만들기를 좋아한 것뿐이죠. 장애인의 서사에 장애의 의미를 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유튜브도 일상 얘기 위주죠. 그런데 영상에 어쩌다 휠체어가 등장하면 조회 수가 확 올라가요. 늘 고민되는 지점이에요. 유튜버로서 조회 수를 올리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으니까요. 하하.
COSMO 어떻게 보면 질병과 장애, 단순 개인 특성 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요. 예를 들어 저는 지금 콘택트렌즈를 빼면 앞에 앉아 있는 두 분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데 장애인으로 여기진 않잖아요?
조한 복지 차원에서는 혜택을 위해 질병과 장애 등을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일상에서는 그 구분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사람이 어떤 니즈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죠.
구르님 뇌성마비도 다 똑같진 않아요. 뇌 일부가 손상되기 때문에 저처럼 운동신경만 마비되기도 하지만 언어 장애나 지적 장애를 동반할 수도 있죠.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조한 장기적인 의료가 필요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분명 있고, 환자이기도 하면서 장애인인 경우도 많아요. ‘교차성’이 중요해요.
구르님 그런 의미에서 ‘장애 여성’이라는 말도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저는 장애라는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얽혀 있는 사람이잖아요.
COSMO 맞아요. 예를 들어 여성의 장애는 성적으로 소비된다는 문제가 있죠.
구르님 제 인터뷰 기사가 포털 메인에 걸린 적이 있어요. 당시 제가 미성년자임에도 댓글 창에 온갖 성희롱이 난무했죠. 연애할 때도 장애 여성은 주체가 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지금 남자 친구는 비장애인인데 손잡고 길을 지나가다 보면 남자 친구에게 ‘엄지 척’을 날리거나 심지어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장애 여성과 비장애 남성이 사귀면 남성이 헌신적이고 대단한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장애 남성과 비장애 여성이 사귀어도 남성이 능력 있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워요. 제가 아는 어떤 남성 장애인분은 연애할 때 주변에서 “저런 애도 연애하는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대요.
조한 ‘몸이 아프다’는 게 여성성을 강화하기도 하죠. 크고 건강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 “나도 한번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봤으면 좋겠다”라고 한탄하는 게 개그 소재가 되곤 하잖아요. 병약함은 성적 매력이 아니라 족쇄인데 말이에요. 병약함을 여성성으로 생각하고, 탄탄한 몸의 여성들을 여성스럽지 못하다면서 희화화하는 문화가 깨져야 여성들이 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해요.
COSMO 여자들은 아프다고 하면 꾀병이냐는 오해를 사기 쉽잖아요. 직장에서는 괜히 약해 보일까 봐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더 꺼려지죠.
구르님 한편으로는 여성운동에서 지향하는 여성성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도 받아요. 자립적이고, 굳세고, 비혼과 비출산을 지향하는 여성이죠. 그런데 장애 여성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자체가 여성운동이 될 수 있어요. 자유롭게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 “그 몸으로 어떻게 임신을 견디냐?”라고 하고, 심지어 임신 중단을 강요하기도 하죠.
COSMO 탈코르셋도 어쩌면 젊고 ‘일반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죠.
조한 장애 여성들은 ‘정상적인’ 여성성을 갖는 게 정체성 형성에 중요해요. 여태까지 너무나 중성적인 존재로만 여겨졌거든요. 특히 예전에는 장애인 화장실에 성별 구분도 없었어요.
구르님 유튜브 초기에는 장애 여성도 사랑의 주체, 매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애 여성들에게는 꾸밀 권리 자체가 없으니까 반발 심리가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화장을 안 하면 카메라를 켜지 않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주체적으로’ 꾸미고 싶은데 자꾸 얽매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영상 찍을 때 화장을 잘 안 하려 해요. 그때는 ‘장애가 있어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추구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굳이 뭔가 더 이루거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COSMO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조한 타인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일이 많아요. 아프기 이전의 제 체력이 그립죠.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됐는지 생각하며 살아라”라고도 하지만, 그보다 제게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는 게 더 어렵고도 중요해졌어요.
구르님 여담이지만 저는 말하는 것과 달리 글은 정말 못 써요. 하하. 자기 자신이 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에 대해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내가 부러움을 느끼고 있구나’ 정도만 알아도 된다고 봐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게 되면 그게 진짜 ‘보디 포지티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