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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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앵커 기용을 계기로 보수적인 KBS 조직의 변화를 실감한다는 반응이 많아요. “여성 앵커로 간판 장사 할 것 아니다, 여기자라서가 아니라 우수해서 뽑았다”라는 선발 후기가 전해지는데, 오히려 ‘간판 장사면 또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시대의 흐름이죠. ‘변화하려는, 시청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려는’ KBS의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간판 장사라고 해도 앵커직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는 아니라고 봐요. 형식의 변화도 중요한 메시지니까요. 처음엔 제가 메인 앵커가 된 게 이렇게 화제가 될 일인지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동시에 저 스스로도 〈KBS 뉴스 9〉 메인 앵커는 당연히 연차가 훨씬 높은 남자 선배가 할 거라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졌죠.
18년 차 기자예요. 예전에는 여성 기자가 일하기에 더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 같은데요, 일하면서 차별이나 부당함을 당한 적은 없어요?
신입 기자 시절만 해도 군대식, 도제식 문화가 당연시됐죠. 타 방송사 최종 면접에서 “나이 든 여기자를 누가 앵커 시키냐”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일부 고참은 특종을 물어 왔을 때 “역시 그 인간(취재원)은 여자를 좋아해”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죠. 선배들의 가르침에는 남녀 구분이 없는 편이었는데, 오히려 출입처나 취재원의 태도가 더 녹록지 않았어요. 1년 차 때 모 경찰서장이 “이 아가씨야” 운운해서 크게 싸운 적도 있고, 2년 차 때는 모 지자체장이 출입 기자단 오찬에서 “거기 언니, 술 좀 따라봐”라고 한 적도 있거든요. 지금은 18년 전과 보도국 문화가 많이 달라졌어요. 저녁 9시 뉴스의 톱 리포트를 여기자가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고, 정치부나 경제부의 부장과 데스크가 여성인 것도 자연스럽잖아요.
전통적인 언론 매체, 레거시 미디어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 속에서 KBS 뉴스의 역할은 뭘까요?
과거의 뉴스가 ‘시청자들을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같이 손잡고 가는’ KBS 뉴스를 만들기 위해 고민해요. 시청자들과 눈 맞추고, 같이 팩트를 쌓아가면서 어젠다를 만들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뉴스를 지향하고 있죠. 제가 앵커가 된 이후 KBS 뉴스가 “젊어졌다”, “편안하다”, “나한테 눈 맞추고 얘기하는 것 같다”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감사하고 기뻐요. 시청자들이 KBS 시청자 상담실, 게시판 혹은 제 이메일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와요.
뉴스의 색깔을 만드는 것과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들의 결과물을 전달하며 중심을 잡는 것. 앵커의 2가지 역할 사이에서 딜레마는 없나요?
‘중립적 태도=고루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앵커 개인보다는 기자들의 취재와 기사가 뉴스의 색깔을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시청자들이 이소정 개인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보다 뉴스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으며 멘트를 쓰고, 진행하고 있어요.
유튜브 채널 〈크랩(KLAB)〉에서 95년생 기자 지망생과 토크를 했어요. 당시 패널이 KBS 뉴스는 청년이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가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는 피드백을 전했는데, 이후 뉴스에 반영하고 있나요?
청년의 뉴스를 청년 시각에서 전달해야 하는 당연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었더라고요. 그 친구 지적으로 뉴스의 관점을 새롭게 되짚어보게 됐어요. 멘트를 쓸 때 이 뉴스의 주체가 누구인지 신경 쓰고, 주어와 목적어 혹은 문장의 구조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기도 하고요. ‘아나운싱’보다는 ‘스토리텔링’처럼 친구에게 얘기하듯 구어체로 뉴스를 전달하는 것에도 신경 써요.
회사 내에서는 팀장급 상사기도 해요. 젊은 후배들과 교류하는 게 어렵지는 않아요?
어느새 18년 차 고참이 됐는데, 선배보다 후배가 더 어려워요. “라떼는 말이야…” 안 하려고 말수를 줄이는 대신 지갑을 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이번 인터뷰도 후배 기자들과 함께 참여하는 형식이라 응했어요. 소통하고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요. 친한 30대 후배들은 제게 머리 모양, 옷 스타일부터 진행 형식에 대한 피드백을 주곤 하는데, 더 어린 후배들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를 같이 하는 신선민 기자가 수줍게 다가와서 “선배, 신나게 오래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줬을 때는 너무 고마워서 울컥하더라고요.
‘여성’, ‘기자 출신’, ‘40대’ 앵커라는 점에서 주목받았어요. 3가지 키워드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본의 아니게 ‘여성’, ‘기자’의 대표성을 갖게 돼 엄청나게 어깨가 무거워요. 엄마로서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뉴스를 만들고 싶답니다. ‘40대’ 앵커로서는 기존 지상파 앵커들보다 경험과 연륜이 부족한 게 사실인지라 두 배, 세 배로 채찍질하며 공부하고 있어요. ‘방송 기자’로서 저의 쓸모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는데, 〈KBS 뉴스 9〉 앵커를 천년만년 할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가야죠. 아직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좀 더 현장에서 ‘구르면서’ 배우고 싶어요. 그 경험을 살려 시사 다큐멘터리도 더 만들어보고 싶고요.